


1780s
“ 어디 보자… fessī sumus. itaque dēbēs nōs domum dīmittere… 음? ”



시몬 상클레어
35 / 185세 | M | 라틴어 개인 교사
189cm / 89kg



왼눈은 의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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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감 있는/차분한/집요한
불과 몇 세기 전만 해도 라틴어는 고등교육을 위한 필수 과목이였으나 웬만한 수업은 라틴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진행되는
요즘 라틴어는 몇몇 법률용어나 의학용어 외에는 크게 쓰이지 않는 비선호 언어가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그가 라틴어 개인
교습만으로 먹고 살수 있는 것은, 그 어떤 불성실한 학생도 포용하고 끝까지 책임지려는 그의 강습 스타일 덕분일 것이다.
별의별 핑계를 대며 숙제를 해오지 않은 학생이든, 막막한 얼굴로 종이를 보다가 딴짓을 하는 도련님이든, 초췌한 얼굴로
꾸벅꾸벅 조는 의대생이든 그는 어떻게든 그들을 즐거운(?) 라틴어 교습의 세계로 이끌어 내는 열정적인 과외선생이다.
어쩐지 요즘 가르치는 학생들 중 성인보다는 귀족 집안의 자제분의 비중이 늘어났다.
학생이 집중에 어려움을 겪어도 좀처럼 조급해하거나 짜증을 내지 않고 웃으면서 나긋나긋한 말투로 헷갈릴 만한 지점을
조목조목 짚어 준다. 학생 앞이 아니더라도 평소에 화를 낼 줄 모르는 사람처럼 빙긋 웃으면서 다닌다. 누군가 면전에
욕지거리를 하거나 날카로운 말을 던지면 분명 상처받은 얼굴을 하겠지만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야 언성을 높이지 않는다.
인간이 느끼는 모든 종류의 쾌는 결국 배움에서 오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어 학생을 가르치는 데 있어 언제나 성심성의껏 임한다. 물론 일부 학생들은 질색을 하는 태도이다. 흥미로운 말을 듣거나 질문거리가 생기면 눈을 빛내며 가까이 다가오는데, 이 때 제대로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좀처럼 주변에서 사라지지를 않는다. 누군가가 도움을 요청하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혼자서 고심하는 성격. 진중함에 비해 융통성이 없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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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기록된 ‘시몬 상클레어’의 흔적
1663년 규모 7.3-7.9의 지진이라는 날벼락을 경험한 누벨프랑스의 선교사 샤를 라르망은 정확한 피해 규모를 확인하던 중
강가의 무너진 흙 속에서 반짝이는 은십자가 목걸이를 발견했다. 분명 누군가의 분실물이리라고 짐작한 그는 은십자를
주인에게 돌려주기 위해 땅을 헤집다가 27세의 건장한 남성답지 않은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댔다. 흙탕물 속에서 누군가의
상반신을 발견한 것이다.
지진의 규모에 비해 인명피해는 없었던 것으로 파악되어 다들 안도하고 있던 중 어디선가 나타난 백인 남성의 상반신은
누벨프랑스의 이주민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신원 확인을 위해 흙탕물을 최대한 닦아냈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신원
미상의 상반신을 알아보지 못했으나, 예수회 선교사 몇몇은 흥분에 휩싸여 그 상반신은 33년 전 영국 이주민과의 분쟁 중에 사라졌던 선교사 ‘시몬 상클레어’의 것이 분명하다는 의견을 내세웠다. 그들은 상반신의 왼눈의 총상과 33년간 전혀 썩지
않고 보존되었던 시신의 상태를 가리켜 신실한 신도에게 내려진 불후의 기적이라고 주장했다.
인명피해가 전무한 지진, 그리고 ‘불후’. 적어도 두 건의 기적이 일어났음을 확신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이 모든 내용을
(약간의 과장을 섞어) 기록한 보고서를 누발프랑스의 주교에게 전달했다. 약 한 달 후에 (역시 전혀 썩지 않은) 그의 하반신도 발견되었는데, 신도들은 관을 새로 짜는 대신 하반신을 위한 관을 따로 제작하여 시신을 보관하기로 했다. 시몬 상클레어의 상반신과 하반신은 그렇게 각기 다른 관에 분리된 상태로 그의 고향인 프랑스로 돌아오게 되었다.
1671년. 시몬 상클레어를 사후 성인 후보자로 시성해 달라는 청원서가 교황청의 심사를 통과하여 시성을 위한
심사 절차가 시작되었다.
1692년 그리고 1712년, 2차례에 걸쳐 그의 무덤을 열어 유해를 확인했으나
여전히 썩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방금 전에 잠든 것 처럼 피부가 부드러웠다고 한다.
1734년 세 번째로 그의 무덤을 열었으나 이번에는 밀랍 처리를 한 후 상체와 하체를 함께 유리관에 넣어 마침내 온전한
한 몸이 되었다. 온전해진 시신은 어떤 성당의 지하 묘지에 안치되었는데, 한동안 ‘이따금씩 관에서 신음 소리가 난다’,
‘12시가 되면 시신이 피눈물을 흘린다’와 같은 근거 없는 괴담이 돌기도 했다.
1747년 6월 18일, 오랜 시간 끝에 시복심사가 통과되어 시몬 상클레어의 시복식이 거행되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시신이 안치된 지하 묘지가 일반 대중에게도 공개되었다.
1747년 6월 19일, 시몬 상클레어의 시신이 은십자가 목걸이만을 남기고 증발했다.
1747년 6월 20일. 작가이자 불멸자 A는 자신의 방 바닥에 뉘어 놓은 시몬의 뇌에서 끄집어낸 총알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어쩐지 발로 차도 안움직이더라.
1747년 6월 24일, 시몬 상클레어는 117년 만에 처음으로 제대로 된 아침 식사를 하게 되었다.
직업
본디 성경 구절 뿐만 아니라 라틴어, 문법, 산수 등을 가르쳤던 선교사 출신이였던 만큼 다시 예수회의 성직자이자 교사의
역할로 돌아오고 싶었으나, 어째서인지 성당 근처에만 가도 구역감과 이명, 식은땀 등의 스트레스 반응이 일어나 성직자는
커녕 평일 미사조차 참여하지 못하는 상태임을 깨닫고 한동안 좌절했다. 백년 이상의 공백기 동안 교육과정은 물론 신학
논쟁에서의 주요 담론이 거의 180도 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 처음에는 무척이나 당황하였으나 점차 근대 철학과 신학에
심취하여 적극적으로 공부하게 되었다. 새로운 취미를 가지게 된 것은 분명 바람직한 일이였으나 18세기에 어느 정도
적응한 시몬은 여전히 무일푼의 백수였다. 결국 시몬은 A의 도움으로 라틴어 개인 교사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기타
-1747년 이전의 삶은 기억이 흐릿한 듯 하다. 대충 누벨프랑스로 이주한 성직자였다는 것 정도?
-새벽에 일어나 동네를 산책하다가 일출을 보는 것을 인생의 큰 기쁨 중의 하나로 삼고 있다.
-대체로 규칙적인 삶을 유지하려고 한다.
-프랑스어, 영어, 이탈리아어, 라틴어에 능통하고 웬다트어도 어느 정도 알고 있으며 독일어를 쓰고 읽을 줄 안다.
-1764년 예수회 탄압령 이후 시대가 정말 바뀌었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 가끔씩 허리가 시큰거리는 모양이다.
-왼눈은 누벨프랑스에 두고 와 버렸다. 아마도.
-최근 요한 게오르그 하만의 에세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생일은 6월 24일로 정해 두기로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