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0s

“ 오늘도 좋은 아침이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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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먼 싱클레어
시몬 상클레어
35 / 245세 | M | 철학과 교수
189cm / 89k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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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한/어쩌면 태평한/사교적인
혼란스러운 시대상황에 의해 잠시 배움의 길을 중단해야 했던 시몬은 프로이센에서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되자마자 다시 평소의 루틴으로 접어들었다. 새벽에 일어나 가볍게 산책을 하며 일출을 보고, 신문과 다양한 서적을 구입해서 읽고, 정해진 시간마다 혼자서 기도를 올리고… 베를린에서든, 이베르돈에서든, 취리히에서든 그는 24시간을 허투루 사용하는 법이 없었고 그야말로 모범적인 시민의 표본으로 지내 왔다.
반복적이고 보람찬 삶은 시몬에게 마음의 평화를 되찾아 준 듯 했다. 그 덕분인지 언제나 입가에 띄우고 있는 미소는 단순한 ‘차분함’ 에서 ‘여유로움’을 넘어 ‘뻔뻔스러움’을 띄기 시작했다. 특별한 계기 없이 어느 순간부터 무슨 일이 있어도 일이 잘 풀릴 거라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다.
약 60년의 세월동안 특별히 말주변이 좋아지거나 카리스마가 생기지는 않았으나 언제나 마주하는 상대에게 진심으로 다가가는 태도 때문인지 이번 삶에서는 특히나 주변에 사람이 많아졌다. 그는 학생들에게는 친절하고 인기 있는 교수였고 교육자들에게는 실력 있는 이상주의자였으며 지인들에게는 좋은 상담가이자 친구였다. 덕분에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지내야 하는 불멸자 치고 수상하게 아는 사람이 많은 사내가 되어버렸다. 최근에는 런던 철도 동호회의 주축이 되어 더더욱 발이 넓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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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간단한 행적
1807년- 프로이센, 베를린에서 새 의안을 구한 후 한동안 정세를 살피며 지냈다..
1809년- 스위스, 이베르돈으로 이동하여 페스탈로치의 학교에서 그의 교육사상을 수학 한 후
취리히에서 작은 학교를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1818년- 베를린으로 돌아가 베를린 대학교(현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1831년- 미국으로 떠날 생각이였으나 영국에 철도가 개통되었다는 것을 듣고 궁금증을 느껴 영국으로 오고,
그대로 철도의 세계에 매료되었다.
1832년 베를린에서 쌓아올린 화려한(?) 이력의 도움으로 옥스포드에서 철학을 가르치게 되었다.
직업
결국 영국에서도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에 정착하게 되었다. 프로이센에서 학위를 딴 외국인 신임 교수로서(프랑스인?
스위스인? 발음만 봐서 프랑스인이였으나 정확히 아는 이는 없었다) 가벼운 텃세를 감수하고 있으나 뻔뻔스럽게
출퇴근하면서 ‘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교수님’으로 잘만 살아가고 있다.
취미
영국에 와서 증기 기차르 보고 어떤 알 수 없는 벅차오름을 느끼는 듯 하더니 그대로 철도 애호가가 되었다.
휴식시간에 기차역 탐방을 가거나 왕복행 기차를 타곤 한다.
최근 동료 교수에게 다게레오타입 카메라를 선물받아 시간이 날 때마다 이것저것 찍어보고 있다. 정물이나 풍경화보다는
인물 사진을 찍는 것을 선호하는데,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선호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단순히 실력 탓인지 (많이)
흐릿하더라도 자연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인물 사진들이 대다수. 잘 나온 인물 사진은 주변의 지인들에게 선물로 나눠
준다. 이따금씩 증기 기관차의 사진도 찍어 보는데, 결과가 눈으로 보는 것 만큼 만족스럽지는 않은 모양이다.
물론 만족도랑 별개로 전부 깨끗하게 보관하는 중.
기타
영국에서 종교친우회 출신의 렌즈 제작가와 친분을 맺어 그에게 의안과 더불어 카메라용 렌즈를 구입하고 있다.
기존에 쓰던 의안만큼 감쪽같지는 않아서 처음에는 조금 실망했으나, 이내 색상이 다양한 의안을 보유하게 되었다.
패션처럼 바꿔 끼우고 다닌다.
바로 옆 건물에서 생활하고 있는 외과의와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성당에 다니지 않은 지 이제 어언 100 년이 다 되어 가지만 아직 스스로를 가톨릭 신자로 여기고 있다.
남들에게는 영 그렇게 보이지는 않은 모양.
취리히에서 얼마간 콧수염을 길렀었지만 생각보다 답답했는지 다시 밀어버렸다.
이름의 철자는 유지한 채로 영국식 발음으로 바꾸기만 했다.
새벽에 산책을 나가 일출을 보는 것은 여전히 삶의 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