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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s

“ 눈은 몸의 등불이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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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먼 세인트클레어 

시몬 상클레어

 

35 / 325세 | M | 가톨릭 신부

189cm / 80kg

디자인은 조금 달라졌지만, 오랜만에 사제복을 다시 입게 되었다. 의안은 홍채가 없는 희끄무레한 유리알로 변경했으며 동그란 선글라스를 쓰고 다닌다. 늘 어깨에 맨 손바닥만한 가죽 주머니에 초소형 폴딩 카메라를 넣고 다니며 지팡이를 짚고 다닌다.

사제복 밑단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지만 왼쪽 다리가 의족으로 교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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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분한/사색적인/여전히 긍정적인

 

한 세기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많은 일을 겪었지만 여전히 주변인들에게 친절하고 배움을 중요시하는 평소의 시몬 상클레어다. 이전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예전만큼 세상의 학문/기술적 발전에 따라잡기 위해 발빠르게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 조금 여유를 가지고 흐름을 관찰하는 태도를 조금씩 익히고 있다. 점점 낯설어지는 세상을 살아가며 조바심을 느끼는 것은 그리 합리적이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듯 하다.

 

대화 중 상대에게 온전히 집중하며 열정적으로 말을 이어가는 태도 또한 평소와 다름없다. 다만 이전에는 그러한 열정적인 태도가 평소의 부지런한 생활 습관에도 반영되었었다면 요즘의 시몬은 무언가를 능동적으로 수행하지 않고 가만히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길어졌다. 

 

대전쟁에 참전한 이후 이런저런 후유증을 겪으면서 1920년대의 경제적 호황 속 들뜬 분위기에 섞여 들어가지 못하고 있으나, 여전히 미래에 대한 막연하고도 견고한 낙관주의적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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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행적

1880 - 1885 켄트에서 건강을 회복한 후 신분을 정리한 시몬은 얼마간의 휴식 기간을 가질 겸 프랑스로 돌아가

사진관을 열었다. 주로 초상사진을 촬영했으나, 그동안 취미로 찍어온 풍경 사진을 책으로 엮어 출판하기도 했다.

1885 - 1889 충분히 휴식을 취했다고 판단한 시몬은 이번에는 대학생의 신분으로 대학으로 돌아가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여 수상하게 성적이 좋은 학부생으로 지냈다.

1889-1894 석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을 진행하던 중 미국과 독일에서 부상하던 새로운

심리 치료 방법론에 대한 연구를 마주하게 되었다.

1895- 1990 박사 학위를 따지마자 미국으로 건너가 성당 건물에 대한 비이성적인 공포 반응을 치유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여러 심리 치료 연구소를 방문하며 상담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사실이 아닌 허구의 이야기를 섞은 진술을 바탕으로 진행된 상담인 만큼 유의미하게 효력이 있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게 되었지만, 주기적인 상담 덕분인지, 혹은 프랑스와 차이가 있던 미국의 성당 건물 양식 때문인지, 혹은 단순히 오랜 세월 동안 성당 건물을 멀리하는 기간 동안 자연스레 옛 트라우마의 영향력이 옅어졌던 것인지, 시몬은 갖은 노력 끝에 드디어 비교적 멀쩡한 상태로 성당에 발을 들일 수 있게 되었다.   

1990-1997 이에 무척이나 감격한 시몬은 성직자의 신분을 되찾기 위해 신학 대학에 입학했고,

얼마간의 시간 끝에 서품을 받게 되었다.

1917-1918  대전쟁이 시작되고 미국 또한 참전하자 전장에서 종부성사를 집전하는 등 군종신부로 활동하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왼쪽 다리를 잃고 무공훈장을 하나 받았다.

 

 현재 직업

전쟁이 끝난 후 성직자의 삶으로 돌아왔으나 다리의 부상과 더불어 참전의 후유증으로 사제의 의무를 수행하는 데

어려움을 겪자 3년간의 안식 기간을 부여받았다. 

 

또 다른 모임

온전한 휴식과 건강의 회복을 위해 부여받은 안식 기간이였으나 연락처를 주고받은 몇몇 병사들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 것을 필두로 어느 순간 참전 용사를 위한 모임을 주최하게 되었다. 10명 내외의 개인적인 만남으로 시작한 모임이 점차 규모를 늘이자 시몬은 주최자 역할을 타인에게 넘겼으나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물론 가톨릭 교회를 통해 생계에 어려움을 겪는 참전 용사들에게 기부금을 전달하는 사업을 진행하는 등 모임의 주축으로 남게 되었다.

 

취미

기차에 대한 관심은 어느 정도 줄어든 반면 사진에 대한 애정은 전혀 식지 않았다. 현재 애용하고 있는 사진기는 1913년에

구입한 초소형 폴딩 카메라. 전쟁터까지 들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멀쩡히 잘 작동한다. 

 광석 라디오 키트를 구입한 이후 라디오를 조립하고 개조하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다리의 행방

대전쟁의 막바지에 큰 부상을 입고 왼쪽 무릎 아래를 절단하게 되었으나 수술을 집행했던 군의관과의 긴 실랑이 끝에

운이 좋게도 떨어져나간 신체의 일부를 간직한 채로 귀환할 수 있었다. 현재는 금고에 보관하고 있다.  

 

 

기타

강한 빛을 마주하게 되면 심한 편두통이 발생하는 증상이 생기는 바람에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게 되었다. 

실은 안식 기간이 끝난 후 아예 사제복을 벗고 환속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 성직자 신분을 되찾은 것이 생각했던 것 만큼

의미있게 다가오지는 않았던 모양. 무엇보다 교육자로서의 삶에 미련이 조금 남은 듯하다.  

예전만큼 새벽 산책을 자주 다니지는 않지만 일찍 일어나서 창 밖의 일출을 바라보는 루틴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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